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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새벽설교 말씀] 2021-1-13 (수) 누가복음 5:12-26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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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교육목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 조회 2,323회 | 작성일 21-01-1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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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이상한 부분이 아주 많다.
첫째, 나병이 손이나 얼굴에 조금만 난 것도 아니고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버젓이 동네에 나타나서 그것도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잔뜩 받고 있는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병환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에서 격리되어 사람들 근처에 오지 못하는 아주 부정한 인간 취급을 받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 나병환자의 말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제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소서”가 아니라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동네 사람들한테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사람 치고는 어떻게 보면 남의 말하듯이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행동이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나병 환자를 고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현장에 가지 않고도 고치신 적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니까 예수님이 어디에다 손을 대든지 고름이 흐르는 문드러진 그 환부에 손이 닿았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론 없었을 것이고).

넷째,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예수님이다. 그 당시 불치병인 나병 환자를 말씀으로 간단히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에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조용히 가서 제사장에게만 보이고 그 당시의 율례대로 (치유가 되었음을 입증하고 사회로의 복귀) 행하라고 경고까지 하신다.

다섯째, 예수님의 시기 적절하지 않은 retreat (뒤로 물러감)이다. 소문이 더 퍼져서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는데 예수님은 유명세를 탈 그 절호의 찬스를 이용하기는 커녕 도망가서 혼자 기도하신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우리는 보통 리트릿 (retreat 수양회)가면 조용히 하나님과 단 둘이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없고 하루 종일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리트릿 갔다 와서 정말 리트릿을 해야 할 정도이다.

여섯째, 우리가 잘 아는 중풍병자 사건의 의문점들이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다고 남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는 행동부터 납득이 안 간다. 우리가 하두 많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만약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면 다른 시간이나 다른 날에 올 수도 있는데 (물론 여건상 꼭 그 날 그때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온 것, 그리고 사람이 많아서 들어갈 수 없으면 ‘사람 없을 때 다시 오자’라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위로 올라가서 환자를 침상째 예수님 앞에 내려 놓은 것, 또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남의 지붕을 부수는 행동이나 설교 중에 분위기를 깨는 그들의 무례한 행동임에도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바로 고쳐 주신 것 (중풍병자나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한테 아무 간청이나 설명도 없이 그냥 들이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뒤에 일어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한테 따지는 신학적인 문제는 따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이상 여러가지 이상한 점들이 이 본문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것은 이런 이상한 점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그냥 ‘그런가보다’ 하거나 뭐든지 ‘믿음으로…’ 라고 넘어가는 것 같다. (물론 이미 답을 다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자, 그럼 위에 열거한 6가지 이상한 점들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을 나누어 보자. 

보통 이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사건 (눅5:17-26, 마9:1-8, 막2:1-12)을 통해 많이 듣는 설교는 대부분 “우리도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의 믿음을 보라, 우리도 이렇게 어떤 장애나 방해가 있더라도 끝까지 열심을 내어, 심지어 남의 집의 지붕을 뜯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께 나아가서 고침을 받자, 즉 우리의 열심 또는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자극하고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물론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 (사람)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표적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것이 모든 표적들의 목적이고 중심이다. 우리 (인간)의 열심이 주인 되어 앞에 나서기 전에 예수님 (하나님)의 열심이 spot light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나온 여섯 가지의 질문을 아래와 같이 한가지로 다 통일하여 대답할 수 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바로 인간의 부정함 (나병, 중풍병) 즉 죄라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불치병을 해결하러 오신 ‘구원주 (Savior and Lord), 메시아’라는 것이다.

1) 나병 환자가 격리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타남 --> 나병환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격리시킨 “죄”를 넘어 구원주,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다.
2) 나병 환자의  --> 예수님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오신 분이시므로 “원하시면”이라는 질문이 나오고 그 대답이 “내가 원한다”인 것이다. (물론 나병 환자이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소경 바디매오처럼 소란을 피우면서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접근한 상황적인 배경도 있다)
3) 예수님이 환부에 손을 대시는 행동 --> 자신이 생명을 바치면서 죄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므로 그 죄에 손을 대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과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손가락으로 땅 (흙)에 무언가를 쓰시는 장면과 여인의 구원, 그 다음 9장에 나오는 실로암 못에 가서 눈에 바른 진흙을 씻은 소경이 빛을 보게 되고 구원을 얻는 사건, 둘 다 예수님이 죄 (흙)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표적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아래 부록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물론 사랑과 긍휼의 예수님이므로 ‘나병 환자의 더러운 상처 (환부)도 개의치 않고 손을 대셨다’라고 생각해도 맞지만 사실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예수님의 상징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의 모습이다.
4) 소문나지 않도록 경고하심 --> 사람들이 표적 자체에 집중할까 봐 또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때를 생각하시므로 경고하신 것이다.
5) 사람들을 피하심 --> 기도할 시간이 필요도 하시지만 표적 (치유)에만 관심 갖고 몰려드는 무리들을 피하신다. 위의 4번과 같은 이유이다 (오병이어의 표적 이후에도 마찬가지 이유로 무리들을 피하신다).
6) 중풍병자 사건 -->  예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 쪽에서도 그리고 인간 쪽에서도)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 그들 (친구들)의 태도가 바로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믿는 믿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문제가 바로 중풍병자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꼼짝 못하는 무력함’이므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신성선포’를 ‘신성모독’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수천년을 기다린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말이다. 바로 코앞에서 보면서도 못 깨닫는 그들, 그리고 성경을 눈뜨고 읽으면서도 그 말씀의 의미인 본질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그 예수님을 향해 우리는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해야 되는가)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인간)가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적인 해석으로만 끝나는 오늘날의 크리스찬들, 별로 다를 게 없다. 주여~!


부록: 요8장의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과 요9장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표적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 (요8:1-11) = 인간들의 죄에 빠져 있는 모습
 
은밀한 간음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잡혀 공개적인 자리로 끌려온 여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뜨리려고 (은밀한 계략)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시험하는 못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모두 다 죄인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마치 돌 맞아 죽어야 되는 그 여자 대신 목숨을 내줌으로 죄값을 치루는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인간들의 죄를 상징하는 땅 (흙)에 대고 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2:7).” 그리고 죄를 지음으로 저주를 받아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 되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3:19).” 바로 그 흙 (땅)에다가 묵묵히 손가락을 대시고 무엇을 쓰고 있으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고 하신 것도 그 중에 죄 없는 자는 바로 본인 혼자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들은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다 사라진다. 오직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돌로 그 여자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복잡한 죄의 문제를 너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조롱하듯이 예수님을 다구치며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 가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죄 (음행 = 영적 간음 = 우상숭배)를 대표하는 여인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남는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할 그 여자는 살려 보낸다. 우리는 (율법 자체 이신) 그 분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8장 마지막 절인 8:59에 보면 ‘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한다. 물론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므로 그리고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 되므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뒤집어 쓰심, 갈3:13, 신21:23) 예수님은 몸을 피한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9장 전체) = 날 때부터 빛을 못 보는 (인간들의) 죄인의 모습
이 표적은 사실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 사건 바로 다음인) 8:12부터 이미 암시되어 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의 현장 교육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요한복음 9장 전체의 표적이다.
날 때부터 맹인이란 것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무력한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빛 (눈으로 보는 가시적인 빛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 영적인 빛 즉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되는 이유는, 진흙은 바로 예수님 (빛)을 못 보게 하는 덕지덕지 두껍게 눈을 가리고 있는 인간의 죄를 상징하고 실로암 못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부러 ‘실로암’ =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놓고 있는 것이다.) 또 맹인의 입을 통해서도 그것을 말한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9:33).” 그리고 그 맹인도 (보냄을 받은) 예수님으로부터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고 빛 (구원)을 얻는다.
실로암 못에 관한 것은 한 달 전에 (12-14-20) 올린 큐티 “히스기야 터널”에 보면 좀 더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은 ‘ (땅, 진흙)’이라는 포인트로 연결해서 예수님이 왜 손가락으로 에 무언가를 쓰셨는지, 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에 성령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시고 알게 해주셔서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할렐루야!
오늘 내용이 새벽설교 인데 appetizer같이 가볍지 않고 main dish같이 좀 heavy하게 느낀다면 천천히 꼭꼭 chew 해서 잘 소화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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