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16-23 그림자 놀이 (Shadow Game) 2021-12-2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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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육목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 조회 3,180회 | 작성일 21-12-26 22:36본문
어렸을 때 그림자 놀이를 한 기억이 있다. 아주 심플한 놀이이다. 상대방의 그림자를 먼저 밟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오늘 본문은 음식, 절기, 초하루,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지켰던 음식, 절기, 초하루, 안식일은 다 초림하신 예수님 (구약에서 보았을 때 장래일)을 가리키는 예표로서 예수님이 실체 (몸)이므로 그것으로 인해 생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실체는 예수님이고 음식, 절기, 초하루, 안식일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제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신 마당에 그림자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4살 때 나의 아버지를 처음 보았다. 아버지께서 내가 엄마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나서 4년 뒤에 돌아오셨기 때문이다. 60년대 초의 일이므로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미국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엄마와 4살짜리 꼬마인 나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기차를 타고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엄마가 “훈아, 아빠!”하고 나를 아버지 품에 와락 안기도록 밀었는데 그때 내가 안기지 않고 오히려 “철썩”하고 아버지 뺨을 때렸다. (나는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에 없는데 내가 그랬다고 한다.)
내가 도대체 그때 왜 아버지 뺨을 때렸을까? 아마 이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그날 이상하게 흥분하면서 어떤 처음 보는 아저씨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싫었고 (전문용어로 ‘상대적 박탈감’?) 그 키 큰 아저씨가 나를 덥석 안으려고 하는게 무서웠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난 4년간, 내 whole life동안, 매일 아침 마다 눈만 뜨면 벽에 붙어 있는 아빠 사진보고 ‘아빠, 아빠’ 하고 ‘아빠 굿모닝, 아빠 알라뷰’하고 사진에다 뽀뽀하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어떤 처음 보는 아저씨보고 아빠라니, 으잉, 이건 뭐지? 하는 아주 심한 낯가리 (전문용어로 ‘사회적 거리두기?’)였던 것 같다.
몇 년 전 어느 날 이 어렸을 때의 나의 불효 (?)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면서 왜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만났을 때 그를 못 알아보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4살 때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매일 보아왔던 사진 속의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막상 내 앞에 와있는 진짜 아버지는 거부하면서 뺨을 후려친 것처럼 유대인들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마음에 안 들고 싫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매일 가까이 한 그림자 (허상)을 껴안고는 눈 앞에 있는 실상 (실체)을 가차없이 밀어낸 것이다. 아니 밀어낸 것 뿐만 아니라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아~ 정말 못난 아들, 못난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그래도 철없는 4살짜리 꼬마였기나 했지, 유대인들은…뭐냐)
2:18-19은 살짝 어렵기 때문에 이럴 때는 여러가지 버전으로 읽어 보면 도움이 된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자.
“일부러 겸손한 체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환상을 과장하며 헛된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 몸은 이 머리를 통해 각 마디와 힘줄로 서로 연결되어 영양 공급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2:20의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어째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손대지 말아라! 맛보지 말아라! 만지지 말아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적 규정에 복종하느냐고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2:23 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도움이 된다.
“이런 규정들은 제멋대로 만든 종교적 숭배나 거짓된 겸손이나 자기 몸을 괴롭히는 데는 지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체의 정욕을 막는 데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 때문에 진짜 본질적인 것을 놓쳐버린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것을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타인 에게까지 강요하고 따르도록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므로 사도 바울처럼 누군가 이렇게 강하게 꾸짖고 돌이키게 해야 하는데 그게 현대 교회안에서 실행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뭐가 본질적인 것인지도 헷갈리고 있고 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이다. 하나님께 정말 죄송하게도 ‘치리’와 ‘징계’는 현대 교회에서 매우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까 봐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아닐까?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그대로 따를 수 있는 정직한 영을 허락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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